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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테슬라 VS 에디슨!!!
  • 최고관리자
  • 2020.06.27
  • 조회수 : 1922

모두가 직류에 집중하고 있을 때 과감하게 교류의 장점을 먼저 알아보고 이를 알린 과학자 니콜라 테슬라.


시대를 앞서 갔던 그의 업적은 날이 갈수록 더욱 빛을 내고 있다.

이름 앞에 늘 천재 과학자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던 테슬라가 바라본 미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니콜라 테슬라 VS 에

<니콜라 테슬라>


테슬라는 1856년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났다. 성직자로 일하던 아버지는 아들이 자신과 같은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다.

테슬라는 아버지의 권유를 이기지 못하고 관심에도 없던 성경 공부를 해야 했다. 그러다 10대 중반이던 어느 날 갑자기 콜레라에 걸리면서 생사를 넘나들 정도로 위중한 상태가 된다. 의사도 그가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9개월 동안 전염병과 싸우다 다행이도 건강을 회복하게 됐다.

다시 건강을 되찾은 아들에게 아버지는 원하는 일을 해도 좋다는 약속을 했다. 테슬라는 호기심이 많았고 발명에 관심이 있었다. 장래희망도 과학자였다. 그는 과학자도 충분히 발명으로 세상을 이롭게 하는 좋은 직업이라며 아버지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이를 허락했고 이후 성직자가 되라는 강요는 더는 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종합기술학교에 다니기도 했으나 가정 형편으로 학교를 그만둔다. 대신 혼자서 학업을 이어간다. 독학이라면 힘들만도 한데 그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점이 하나 있었다.

그는 비상한 두뇌를 가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놀라운 암기력으로 책 전체를 암기하고 암산 능력도 탁월했다. 전자기학은 물론 통신, 자동차 등 다양한 분야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대부분은 독학으로 터득했을 정도로 학습 능력이 우수했다. 5개 국어를 구사할 정도로 언어에서도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능력은 자신이 관심을 가졌던 기술 분야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19살 되던 해 오스트리아에 있는 그라츠대학교에 입학해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1881년부터 헝가리에 위치한 전신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늘어지게 쉬지 않았다. 대신 업무와 관련된 공부에 매진했다. 천재는 게으르다는 말도 테슬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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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류모터>



프랑스 파리로 간 테슬라는 토머스 에디슨이 세운 전기조명회사 파리 지사에 취직하게 된다. 회사에서는 직류 발전소를 수리하는 업무를 맡았다. 테슬라는 이 시기에 모터를 비롯해 변압기, 송전장치 등 교류 전기를 이용한 기계를 발명하기 시작했다. 그의 능력을 알아본 고용주 찰스 배첼러는 테슬라를 에디슨에게 소개하기로 마음먹는다. 1884년 테슬라는 배첼러가 써준 추천서를 들고 미국에 있는 에디슨을 찾아가게 된다. 추천서에는 "내가 아는 훌륭한 사람 두 명이 있는데 한 명은 에디슨 당신이고 다른 한 명은 이 젊은이입니다"라고 적혀있었다.

에디슨과 테슬라는 그렇게 처음 만났고 함께 일하게 됐다. 에디슨은 테슬라가 자신의 직류 발전소를 개선해주기를 원했고 성공 보수로 5만 달러를 제안했다. 이를 수락한 테슬라는 곧 작업에 투입됐다.


니콜라 테슬라 VS 에
 

테슬라가 보기에 직류는 이상적인 전류 송전 방식이 아니었다. 직류 방식은 비용도 많이 들고 에너지 손실이 커 곳곳마다 발전소를 설치해야 했다. 결코 효율이 좋은 방식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반면 교류는 직류보다 더 저렴하고 편리하게 전기 공급이 가능했다. 고전압 송전으로 먼 곳까지도 전력을 보낼 수 있었다. 교류 방식이 가진 장점이 훨씬 크다고 생각했다. 당시 교류는 위험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고 잘 사용하지 않던 시기였다. 교류에 대해 회의적이다 보니 제대로 된 교류 전동기도 없었다. 교류 방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은 점점 구체화됐다.

에디슨에게 직류 대신 교류를 도입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세 묵살된다. 에디슨이 교류 도입에 반대하는 이유가 있었다. 에디슨은 직류 전기와 관련된 많은 사업과 연관된 상황이었고 기존 방식을 교류로 변경하면 자신이 그동안 구축해온 모든 것을 버려야 해 위기가 닥쳐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철저히 사업적인 부분을 중심에 놓고 내린 판단이었다. 교류 방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테슬라는 기존 에디슨의 직류 발전기 성능을 크게 향상시키는데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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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발전소 근처에 직류 전력선을 매설하고 있다>


일이 잘 풀리는 것처럼 보였으나 테슬라는 작업을 끝내자마자 에디슨의 회사를 그만뒀다. 테슬라는 성공적인 직류 발전기를 개발했는데도 불구하고 에디슨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은 것에 화가 났다. 성공 보수로 5만 달러를 주겠다는 약속을 농담 정도로 여기는 에디슨의 모습에도 크게 실망했다. 더는 회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었다.

에디슨에게는 테슬라를 향한 일종의 질투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테슬라의 영민한 두뇌와 기술을 향한 놀라운 집념이 그를 시기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테슬라는 교류 방식의 가능성을 믿었다. 회사를 나와서는 독자적인 회사를 창업하고 본격적으로 교류 시스템 연구에 돌입했다. 마침내 교류 발전기도 완성했다. 발전소에 교류 방식을 도입하려 했던 웨스팅하우스가 테슬라를 알아봤고 함께 일하게 됐다. 웨스팅하우스는 에디슨과 경쟁하는 기업이었다. 테슬라는 웨스팅하우스가 제공한 실험실에서 교류 연구를 이어갔다.

세계 최초 수력발전 프로젝트인 나이아가라 폭포 수력발전 입찰을 두고 웨스팅하우스와 에디슨은 격돌했다. 단순히 프로젝트 하나 따오는 것쯤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미국을 넘어 전 세계에 직류가 채택되느냐 교류가 채택되느냐가 결정지어지는 중요한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은 둘의 경쟁을 '전류전쟁'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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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에디슨>


이제 직류가 나은지 교류가 나은지 알리는 일만 남았다. 테슬라와 웨스팅하우스는 신문 기사와 연설을 통해 교류의 우수성과 도입의 필요성을 알렸다. 그런데 에디슨은 조금 다른 방법을 택했다. 직류의 장점을 알리기보다는 교류 송전 방식을 음해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다.

에디슨은 교류 방식이 감전 시 위험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교류 전류로 사망한 사람들의 명단을 담은 팸플릿을 배포했다. 교류 방식을 이용한 동물 감전 실험도 진행해 무고한 동물들이 희생시키기도 했다. 교류 방식으로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해 위험한 기술이라는 이미지를 선정적인 방법으로 심어주고자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기의자를 이용한 사형을 제안하고 교류 발전기를 적용하기도 했다. 그의 예상과는 달리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물불 가리지 않는 사업가의 이미지만 남았을 뿐 발명가로서 이룬 업적에마저 균열이 생겼다.

에디슨은 소송으로도 끊임없이 웨스팅하우스를 괴롭혔다. 충분한 자금력이 확보됐던 에디슨과 달리 웨스팅하우스는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다. 테슬라는 교류 시스템이 널리 이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웨스팅하우스에 특허 이용료를 받기를 포기하고 무상으로 특허를 양도하게 된다. 대신 교류 방식이 모두에게 도움되는 방향으로 해달라는 약속을 받는다.

승리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전기 독점 사업권을 따내면서 웨스팅하우스 쪽으로 기울었다.

그해 10월에는 국제 나이아가라 폭포 위원회가 웨스팅하우스에 수력발전소 사업 권한을 웨스팅하우스가 따내면서 전류전쟁은 끝이 났다.

에디슨은 뒤늦게 자신이 직류만 고집했던 과오를 인정했다.



니콜라 테슬라 VS 에
<니콜라 테슬라>


테슬라와 에디슨의 갈등은 1915년 노벨물리학 공동 수상자로 선정되면서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에디슨과 공동 수상인 것이 불쾌했던 테슬라는 그와 같이 받을 수 없다며 수상을 거부했다. 에디슨도 같은 이유로 수상을 거부했고 결국 그해 노벨물리학상은 다른 과학자에게 돌아갔다.

전류 전쟁 이후에도 테슬라는 발명과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몸과 정신 건강이 악화되는 와중에도 새로운 발명을 연구했다. 교류 방식 이외에도 리모컨, 형광등, 컴퓨터 등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술 수백 개를 발명하고 예측했다. 테슬라 정도의 인지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충분히 풍족하게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각종 소송과 악재로 힘든 여생을 보냈고 죽는 순간까지 궁핍함에 시달렸다. 건물 화재로 발명과 관련 있는 방대한 자료들이 모두 불타버리는 일도 겪어야 했다.


테슬라에게는 부귀영화보다도 중요한 것이 있었다.

바로 자신이 걸어온 길이 증명하듯 기술로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목표였다.

그의 뚝심 있는 행동으로 직류 대신 교류 전류가 결국 세상을 밝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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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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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츠남님의 댓글

no_profile 벤츠남 쪽지 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테슬라에 대해서 요즘 많이 찾아보고있는데 이런 내용은 몰랐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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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지방시님의 댓글

no_profile 람보지방시 쪽지 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커런트워 영화에 나왔었던 내용이네요 ^^ 전 영화봐서 알았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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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쇠질님의 댓글

no_profile 고독한쇠질 쪽지 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에디슨만 알았지 테슬라는 오늘 알게됌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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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서플로우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텐서플로우 쪽지 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전 니콜라 따로 테슬라 따로인줄 알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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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황현희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문을황현희 쪽지 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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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중독님의 댓글

no_profile 카중독 쪽지 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과학사 재밌네요 간만에 ㅎ